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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건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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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처용가 전건호 그날은 명동에서 술 얼콰해져 남산에 올랐던 거라 달빛 어찌 그리 유장하던지 벚꽃 펑펑 튀밥처럼 터지는 봄밤이었어 지난 생 내자였을지도 모를 여자 물감빛 원피스 하늘거리며 꽃잎을 밟으며 걸어오는 거라 그냥 말 한번 걸어보려 다가선 것 뿐인데 짐짓 바삐 갈 곳이라도 있는 양 도리질하..
바람의 독법 전 건호 새벽안개 가르며 자유로 질주하는데 뒷자리에 던져 놓은 책장을 바람이 펄렁펄렁 넘긴다 속도 높아갈수록 열려진 창 틈 비집고 들어와 삼매경에 빠져든다 슬쩍슬쩍 건성으로 책장 넘기다가 속도계 가파르게 높아갈수록 책갈피 사연에 푹 빠져 감정 추스르지 못하고 바쁘게 넘긴다 판도라상..
지독한 최면 고추잠자리 빙빙 맴도는 가을 운동장에 서면 자꾸만 돌고 싶어진다 트랙을 달리는 아이들 뜨거운 숨 턱에 닿아 기진맥진할 때까지 뒤 돌아보지 않듯 둥근 원에 들어서면 사로잡히는 무거운 의무감 빙빙 나를 돌게 만드는 운동장은 둥근 마법을 걸어 세탁기처럼 잡아 돌린다 원안에 들어서면 무조건 ..
가난한 사랑 방충망에 매달려 따뜻한 방을 들여다보던 눈꽃들 팔에 힘이 빠지는지 하나 둘 이십층 아래 허방으로 떨어진다 떨어진 빈자리 철없이 날아와 붙는 눈발 임무교대 하듯 추락과 착지를 반복하며 가느다란 철사에 붙으려 바둥거린다 허공에 걸린 창틀 목숨 걸고 날아와 매달리는 꽃송이들 삭풍에 몸서리..
구름의 왕국 미루나무에 걸린 구름 날렵하게 우듬지 타고 들어가요 산맥이 달리고 강물 굽이쳐요 미지의 땅 사방은 시퍼런 바다 해모수처럼 왕국 건설해요 푸른 초원에 양떼를 풀고 통나무집 짓고 길도 뚫어야 겠어요 방파제 만들어 조각배 몇 척 띄우고 자맥질 하는 물고기도 낚아야 하고요 가고 싶은 곳 있으면 ..
야옹야옹 고양이가 운다 뒷덜미 타고 정수리 뛰어들어 피 묻은 입술 훔친다 쥐구멍 노려보며 형형하게 안광 쏟아내다 내 안 우글거리는 생쥐를 노린다 핵분열 하는 비겁에 쥐구멍 찾는 설치류들 자꾸만 뒷걸음 친다 순식간 늑골까지 내려와 검은 허파를 물어뜯고 내장 깊숙이 웅크린 생쥐를 물어뜯는다 내 혈..
검침원 대문 좀 열어주세요 당신을 검침하러왔거든요 얼마나 피 뜨거운지 에돌아 온 길의 경사 어떠한지 엉성한 거푸집에서 삼킨 음식과 한숨도 점검합니다 환희 가득한 시절 은밀한 속삭임 천당과 지옥 넘나들던 순간 계량기엔 다 기록되어 있어요 생의 고비마다 쿵쿵 뛰던 심장박동 무모하게 역주행한 흔..
판도라상자 급브레이크에 휴대폰을 놓쳤다 네모상자 가득 갇혀있던 고딕체 흘림체 필기체 가시 돋은 독설 발효되지 않은 넋두리들 우르르 쏟아져 바닥을 구른다 비밀스레 보관하던 사진들 유리창에 얼비쳐 화끈거린다 꽁꽁 숨겨두었던 은밀한 문자 얼버무렸던 말들 좁은 상자 갇혀 부대끼며 억눌렸던 스트레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