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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건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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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금살금 아내의 히스테리 피해 살그머니 문을 빠져나와 막내와 어둠 저편 108호를 관찰한다 정육점 같은 불빛 속에서 내가 요리되었구나 파처럼 잘리고 마늘처럼 쪼개지고 양파처럼 벗겨지다가 미원 한 스푼 머리에 뒤집어쓴 채 양념되었구나 아내를 열 받게 하던 후덥지근한 저녁, 드디어 비 내린다 움푹 패..
오래된 길 그가 살던 방에 십년을 누웠더니 벽에 걸린 수묵화로 통하는 길이 열렸다 밤마다 그림 속 냇물에 발을 담그면 그는 낚싯줄 드리우고 나는 바위에 앉아 그만 한없이 쳐다보며 행복했다 별들 졸린 듯 사라지는 새벽 골짜기 자욱하게 안개가 일어나고 물총새 방안으로 날아들어 머리맡 분분하게 날았다 ..
[스크랩] 까치밥/전건호 까치밥 / 전건호 지구의 회전판을 잠시 멈출 수 없을까 날마다 넘겨지는 일력(日曆) 한 쪽 쯤 까치밥으로 남겨둘 수 없을까 눈 속 봄동 파릇 올라와 입맛 돋구 듯 구멍 뚫린 고목의 곁가지처럼 싱그러운 스무 살에 남겨둔 생의 한 켠에 돌아가 시름 덜 순 없을까 늦은 가을 호호백발이 되어 백년을 어긋..
까치밥 지구의 회전판을 잠시 멈출 수 없을까 날마다 넘겨지는 일력(日曆) 한 쪽 쯤 까치밥으로 남겨둘 수 없을까 눈 속 봄동 파릇 올라와 입맛 돋구 듯 구멍 뚫린 고목의 곁가지처럼 싱그러운 스무 살에 남겨둔 생의 한 켠에 돌아가 시름 덜 순 없을까 늦은 가을 호호백발이 되어 백년을 어긋나 수십 생 비껴..
몽유에 들다 2 사랑하고 이별하는 꿈 깨어있다 착각하고 지지고 볶는 이 순간 절반씩 다른 생 나누어 살아가는 셈 아니던가 간 밤 꿈 속 낯선 땅으로 부나비같이 흘러갔어 동구밖 느티 아래 웬 쪼그맣고 까무잡잡 못생긴 여자 나를 보더니 반색하며 반기더군 왜 이제 왔느냐고 입술 쪽쪽 빨아대며 끌어안더니 어서 ..
몽유에 들다 잠들지 않으려는 몸 간신히 다독거리고 네가 잠든 방으로 향한다 너 닮은 인형 품에 안겨주고 조용히 창문을 나서는데 검은 나뭇잎 수런수런 별들 발 아래 툭툭 채여 조마조마 하다 아무리 걸어도 아득한 네 창 닿기도 전 또 뿌연 새벽 어젠 달맞이꽃 대궁만 흔들다 돌아서고 그젠 은사시에 기대어 곤..
연구실에서 현미경으로 물방울 관찰한다 미생물들 우글거리는 게 종각역 1번 출구 같다 사방으로 바쁘게 움직이며 물 한 방울 속 일가를 이룬다 날마다 저 물을 몇 되씩 마시고 배설했다니 망치에 얻어맞은 듯 멍하다 우주 저 편 수억 유순에서 누군가 현미경으로 관찰하고 있다 내가 자궁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
시간의 동쪽 허공을 휘젓는 방울새 어둠을 향해 투망을 던진다 저 날개 짓 어디로 몰려가 폭풍우를 쏟을까 엎드려 잠들다보면 땅속 깊숙이 두런거리는 소리 진원지를 따라 파들어 간다 수직갱도 깊어가던 밤 굴착기 굉음 너머 텅텅 땅이 울리고 캄캄한 벽이 열린다 마침내 지구 저편 라플라타강 졸음은 넘실넘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