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건호
그날은 명동에서 술 얼콰해져
남산에 올랐던 거라
달빛 어찌 그리 유장하던지
벚꽃 펑펑 튀밥처럼 터지는 봄밤이었어
지난 생 내자였을지도 모를 여자
물감빛 원피스 하늘거리며
꽃잎을 밟으며 걸어오는 거라
그냥 말 한번 걸어보려 다가선 것 뿐인데
짐짓 바삐 갈 곳이라도 있는 양
도리질하며 꽃비 속으로 뛰어가는 거라
멍하니 새초롬한 뒷모습만 쫒는데
길섶 문득 건들바람 일어
나를 에돌아 달려가더니
손길 외면한 여자를 더듬어대는 거라
순간 열이 확 오르는 거라
치마를 슬쩍 들치는가 하면
봉긋한 젖가슴 더듬고 머리칼 쓰다듬는데도
수줍은 듯 옷깃 여미는 척만 하며
가만히 몸을 맡기는 게 아닌가
아슬아슬 실 눈 뜨고 바라보는데
바람은 꽃잎으로 길을 덮어 원앙금침 펼치는 게 아닌가
한 번 더 붙잡았으면 품에 안을 수 있었을지 모를 여자
바람에 놀아나는 걸 눈 뻔히 뜨고 보면서
바람난 아내를 떠나보내던 처용처럼
꽃그늘 아래 피실피실 웃음만 나오는 거라
교교한 달빛 받으며 산길 내려서는데
덩실덩실 어깨춤까지 나오는 거라
2009 미네르바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