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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건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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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오십세/전건호 오십세 전 건호 금방 들은 것도 오십초면 증발된다 내가 나를 믿지 못하고 왼손이 오른 손을 믿지 못한다 전화를 걸어놓고 상대에게 누구냐고 묻는다 일년 전 감추어둔 쌈짓돈을 아직도 찾지 못하는 비상한 은닉술에 동네참새들은 닭대가리라는 둥 까마귀 고기를 먹었느냐는 둥 쪼아댄다 닭이든 까마..
[스크랩] 어떤 조문 외 1/전건호 어떤 조문 전 건호 출근길 외곽순환도로를 달리다보면 벽제화장터로 향하는 영구차 행렬이 길을 막아 얼떨결에 조문객이 된다 꽉 막힌 도로 엉거주춤 망자를 따라 달리며 속을 태우지만 세상사 서두를 게 무어냐는 듯 좀처럼 속도를 올리지 않는다 추월을 포기하고 뒤따르다보니 망자와 나 사이 피치..
[스크랩] 드라마를 베끼다/전건호 드라마를 베끼다 전 건호 와이셔츠에 찍힌 입술이 배시시 들어서자 아내가 도끼눈을 뜬다 그러거나 말거나 입술은 피실거린다 입술과 입술 사이에 선 나는 팽팽한 긴장을 참지못해 변명을 한다 정말 모르는 여자야, 난 아무 짓도 안했다고 일방적으로 따라온 거라니까 더듬거리며 변명을 늘어놓는데 ..
한국 나이트/전건호 부처 노자 공자를 만나면 마리화나 한개비씩 권할 거야 환각에 빠진 그들과 수유리 한국관나이트에 몰려가 광란의 디스코를 출 거야 현란한 조명이 잦아들고 부르스타임이 되면 미아리텍사스의 창녀 쌍문시장 생선 파는 노처녀 삼양동 불량한 칼치들과 부킹할 거야 넓고 따스한 가슴에 파묻힌 푸시..
바람의 독법/전건호 새벽안개 가르며 자유로 질주하는데 뒷자리에 던져 놓은 책장을 바람이 펄렁펄렁 넘긴다 속도 높아갈수록 열려진 창 틈 비집고 들어와 삼매경에 빠져든다 슬쩍슬쩍 건성으로 책장 넘기다가 속도계 가파르게 높아갈수록 책갈피 사연에 푹 빠져 감정 추스르지 못하고 바쁘게 넘긴다 판도라상자 열리 ..
[스크랩] 칼국수 전 건호 동의를 구한 적은 없다 수다를 떨다 허기지면 그의 부재를 핑계 삼아 물에 풀어 버린다 소금 간을 하고 주물럭 주물럭 반죽을 해 홍두깨로 넓적하게 밀어 무채 썰 듯 칼질을 한다 칼날이 지날 때마다 그는 영문도 모르고 수백수천 가닥으로 썰어진다 펄펄 끓는 뜨거운 입담 속 비웃음과 조크가..
해빙기/전건호 파랗게 언 몸 찜질방에 눕히자 동태처럼 땀이 난다 축 늘어진 팔 가슴에 올리자 팔딱팔딱 심장이 뛰고 몸이 풀린다 너울너울 밀려오는 졸음을 따라 몸은 아득한 구석기까지 가라 앉는다 자욱한 수증기 너머 동굴 속 울리는 웃음소리 부활한 크로마뇽인처럼 천천히 기지개 켜자 얼음에서 풀려난 기억 ..
낮달/전건호 이른 아침 명동역 출구를 막 나서자 빼곡한 건물 틈 프린스호텔 창문 기웃거리던 하현달 흠칫 놀라 피한다 덕고개 밭두렁 타고 넘던 반달 어느 틈 서울에 올라와 날 새는 줄도 모르고 호텔 창틈 엿보다 꼬리를 밟혔다 못본 채 돌아서다 힐끗 돌아보니 뒷모습 핼쑥하다 찬 바람 부는 겨울 밤 도시의 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