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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밥 지구의 회전판을 잠시 멈출 수 없을까 날마다 넘겨지는 일력(日曆) 한 쪽 쯤 까치밥으로 남겨둘 수 없을까 눈 속 봄동 파릇 올라와 입맛 돋구 듯 구멍 뚫린 고목의 곁가지처럼 싱그러운 스무 살에 남겨둔 생의 한 켠에 돌아가 시름 덜 순 없을까 늦은 가을 호호백발이 되어 백년을 어긋나 수십 생 비껴..
몽유에 들다 2 사랑하고 이별하는 꿈 깨어있다 착각하고 지지고 볶는 이 순간 절반씩 다른 생 나누어 살아가는 셈 아니던가 간 밤 꿈 속 낯선 땅으로 부나비같이 흘러갔어 동구밖 느티 아래 웬 쪼그맣고 까무잡잡 못생긴 여자 나를 보더니 반색하며 반기더군 왜 이제 왔느냐고 입술 쪽쪽 빨아대며 끌어안더니 어서 ..
몽유에 들다 잠들지 않으려는 몸 간신히 다독거리고 네가 잠든 방으로 향한다 너 닮은 인형 품에 안겨주고 조용히 창문을 나서는데 검은 나뭇잎 수런수런 별들 발 아래 툭툭 채여 조마조마 하다 아무리 걸어도 아득한 네 창 닿기도 전 또 뿌연 새벽 어젠 달맞이꽃 대궁만 흔들다 돌아서고 그젠 은사시에 기대어 곤..
연구실에서 현미경으로 물방울 관찰한다 미생물들 우글거리는 게 종각역 1번 출구 같다 사방으로 바쁘게 움직이며 물 한 방울 속 일가를 이룬다 날마다 저 물을 몇 되씩 마시고 배설했다니 망치에 얻어맞은 듯 멍하다 우주 저 편 수억 유순에서 누군가 현미경으로 관찰하고 있다 내가 자궁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
시간의 동쪽 허공을 휘젓는 방울새 어둠을 향해 투망을 던진다 저 날개 짓 어디로 몰려가 폭풍우를 쏟을까 엎드려 잠들다보면 땅속 깊숙이 두런거리는 소리 진원지를 따라 파들어 간다 수직갱도 깊어가던 밤 굴착기 굉음 너머 텅텅 땅이 울리고 캄캄한 벽이 열린다 마침내 지구 저편 라플라타강 졸음은 넘실넘실 ..
블랙데이 2 봄밤이었다 백열등 아래 누운 빈 방 오한이 나고 떨리는데도 진땀 끈적하게 흘러내렸다 아래층 둘둘치킨에서 통닭 튀기는 냄새 창틈으로 스며들어와 나를 후라이 하기 시작했다 천정이 빙빙 돌고 신열이 오르내렸다 벽에 걸린 사각의 거울 속에선 내가 노릿하게 익어가고 있었다 아이들이 치킨 냄새..
페트병 청량리역으로 들어서며 실내등이 꺼져버렸다 에어컨 꺼져버린 전철 끈끈한 땀방울 가슴을 타고 흐른다 조금 남은 생수병을 입에 물고 마지막 한 방울을 들이켰다 여전히 입이 마르다 후줄근하게 팔 다리 풀렸다 순간, 덜컹거리는 전동차 휘청 몸의 중심을 놓치며 히스테릭하게 주무르던 페트병이 바..
[스크랩] 전건호 / 희미한 발자국 신설동 우체국 지나다보면 물컹한 기억 신발에 붙은 진흙처럼 끈끈하다 혜화 돈암 창동까지 날마다 배달되던 발자국에 무수한 발자국 또 덮여도 지나온 흔적마다 쇠비름 노란꽃 피어난다 그녀 내리던 창동역 1번 출구 등나무 아래서서 오가는 발자국 쳐다보면 하루살이 군무같다 무수히 엉키면서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