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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건호시

연구실에서

 

현미경으로 물방울 관찰한다

미생물들 우글거리는 게

종각역 1번 출구 같다

사방으로 바쁘게 움직이며

물 한 방울 속 일가를 이룬다

날마다 저 물을 몇 되씩 마시고 배설했다니

망치에 얻어맞은 듯 멍하다

우주 저 편 수억 유순에서

누군가 현미경으로 관찰하고 있다

내가 자궁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일벌처럼 바쁘게 헤매는 걸

주의깊게 관찰하며 보고서를 쓰고 있다

관찰 받는 나도

또 다른 미생물을 연구하고 있다

나를 관찰하는 이에겐

지구도 물방울 하나에 불과하리라

문득 그가 연구를 끝내면서

툭 지구를 떨어트릴지 모른다

그 사이 나 또한 현미경을 접으며

한 방울의 물 떨구면

그 물방울 포말처럼 퍼져

팔만대천 세계를 이룰 것이다

그 어느 행성에 나처럼 목마른 사내

구천에 사무치고도 남을

그리운 한숨 내쉬면

포말 같은 침방울 은하군단 이루고

가뭇이 많은 생명들 얼키고 설키면서

실핏줄 울리게 사랑하리라는 사실

식은 땀 흘리며 보고서를 쓴다

 

2008 시와세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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