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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건호시

오래된 길

그가 살던 방에 십년을 누웠더니

벽에 걸린 수묵화로 통하는 길이 열렸다

밤마다 그림 속 냇물에 발을 담그면

그는 낚싯줄 드리우고

나는 바위에 앉아

그만 한없이 쳐다보며 행복했다

별들 졸린 듯 사라지는 새벽

골짜기 자욱하게 안개가 일어나고

물총새 방안으로 날아들어

머리맡 분분하게 날았다

굴참나무 점점 내가 누운 자리까지 무성하게 덮고

방안 가득 바람 가득했다

그는 여전히 스무 살 청년이었으나

나는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고

수묵화 속 고목처럼 시들어갔다

그림 속에선 칡넝쿨 뻗어나와

그물처럼 방안을 덮어만 갔다

명자꽃 지는가 싶으면

배롱꽃 가득하고 단풍잎 붉어지더니

또 눈이 내렸다

점점 흐릿해지는 눈으로

가물가물 희미한 길 따라

하루에도 수십 번 그를 찾아 드나들다보면

먼지 풀썩풀썩 뽀얗게 일어나 액자를 덮었다

그를 찾아 그림 속 헤매다보면

새벽닭 울음소리

눈 떠 보면 또 다시 텅 빈 방

헝겊처럼 내동댕이쳐진 나를

창틀에 나팔꽃 

그렁그렁 눈물 맺혀 바라보았다

 

시와 상상 2008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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