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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건호시

달팽이의 산책


詩/달팽이의 산책

전건호 / 시와정신 제8회 신인상 作


컵라면 먹다가
아내가 외마디 비명을 지른다
껍질도 없는 민달팽이
흐물거리며 기어 오르고 있었다
혜성처럼 날아가는 시간 속에서도
아내와 나
저 민달팽이 속도로
얼마나 많은 생 가파른 줄에 매달려
목마르고 힘겨운 해후를 했던가
휙휙 바람 가르며 날아가는 숲속 새들
우리 더딘 만남처럼
민달팽이 저렇게
현기증 나는 시간 안간힘으로 기어올라
마침내 풀잎에 고단하게 엎드려 있다
무색계 너머 찾아온 아내여
수백생 나무로 살다 환생환 내가
바위하나 기어오르다 마감할 생
날카로운 새의 부리 언제 쪼아댈지 모르는
알몸의 느린 생애 앞에 두고
지난 시간처럼 꼬불거리는 라면발
후룩거리다 만나고 있다
광속으로 휘어지는 시간 무색하게
더디고 속절없이 기는 민달팽이
묵묵히 명상 하는 숲을 깨우며
산 오르는 그에게 오늘은 천년의 하루
산길에서 문득 만나
돌처럼 서로 인연임을 알아보지 못하고
외마디 비명 지르는
이 기막힌 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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