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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철도 999 /전건호시인 은하철도 999 / 전건호  정오뉴스 앵커는 범천행 철로가 폭풍우에 끊겨버린 현장을 중계한다정거장에는 백만 년 전과 십만 년 후의 사람들로 북적이고품페이 신라 잉카로 떠나는 기차마다 블랙홀로 사라져버린 지구별에서 탈출한 난민들이 쏟아진다 윤회를 거듭할 때마다대물림처럼 도지는 역마살에 불쑥 떠나온 여행길차갑게 얼어붙은 은하네비게이션은 경로를 수정하며 내가 살았던 별을 조명한다 매미처럼 별과 별을 건너뛰며 궤도를 탐색하지만직항로 끊겨버린 지 오래등불을 켜고 한없이 기다릴 얼굴들 별빛에 사무친다 지친 몸으로 인파를 헤치다흠칫 벼락을 맞은 듯 얼어 붙는다천 년 전의 나와 천 년 후의 내가 멱살을 잡고 싸우는 게 아닌가푸른 별에서 살 섞던 여인발 구르며 뜯어말려도막무가내로 진흙탕 속을 뒹군다 굉음 울리는 기차들 ..
꽃점을 치다 / 전건호시인 꽃점을 치다 / 전건호 당신은 전생에 상제궁의 선관이었어 어느 봄날이었을 게야 춘흥을 못 이겨 선녀들 사는 후궁 넘본 죄로 인간 세상에 떨어진 거라 그래도 제 버릇 못 버리고 예쁜 꽃 보면 아직도 못 꺾어 안달하는 거라 돈 많으면 또 방탕해져 술 여자 밝힐 게 뻔해 살림살이 곤곤하게 주신 거라 그래도 품안에 자식이었던지 가끔은 하늘에 상제궁 쳐다보라고 갈까마귀처럼 외로운 사주 점지하신 거라 그래서 가끔 접동새 우는 봄밤 혼자 몽정하다 잠 못 이룬다는 거라 그 통에 매화꽃은 비처럼 내리고 밤꽃향기에 화개골 여자들만 얼굴 붉히는 거라 꽃 한번 잘못 꺾은 죄로 하얗게 핀 찔레 넝쿨에 갇혀 마흔 해 지내고 있는 거라
별빛이 시간을 관통하는 밤 / 전건호 별빛이 시간을 관통하는 밤 / 전건호  검은 커튼을 걷자 이미 숨을 거둔 행성에서 탈출한 별빛이 허겁지겁 뛰어 들었어 출렁이는 침묵에 가위눌려 오종종 내가 읽던 활자를 배회하며상심 가득 푸른 멍이 든 수화를 하는 거야 목숨 걸고 날아온 시공에서 엇갈렸던 별들과 사라진 별에서 나만 내려 보다 숨 거두던 이의 절박을 온몸으로 말했어 덜컹 내려앉는 심장박동 침묵은 방바닥을 구르고 유리창에 덜컹거렸어맨발로 달려온 바람이 손을 내밀었지만심약한 별빛은 후둘거리는 다리를 가누지 못했어 캄캄한 우주를 날아오는 동안 등불 내걸고 손짓하던 행성들을 끝내 외면하고내 품에 달려와 안기는 별빛 활자들은 허리 굽히고 다독였지만가쁘게 몰아쉬는 숨결에 벽지 속 나리 왈칵 꽃망울 터뜨렸어 이 별에서 만난 꽃들이란 백년마다 바뀌는 시간..
마름꽃 우화 /전건호 마름꽃 우화 / 전건호   삼백 년 전 아내를 만난다칠남매를 낳았고내 병수발에 허리 꼬부라졌던 여자와 마주앉아 백화차를 마신다 찻잔에 떠도는 백가지 꽃잎마다삼백년전 세석평전의 바람이 인다 그녀가 찻잔에 시선을 떨구고 있음은반사되는 지난 삼백 년 전의 하루를 쳐다보고 있음이라주마등 같은 과거지사 앞에잘 살아왔노란 말 한마디 서로 묻지 않기로 한다 수세미덩쿨 같은 자손들이업둥이를 낳고 퍼뜨려 마름꽃처럼 세월의 강을 덮고그 꽃잎으로 찻물을 우리면서서로 손 내밀어 그러쥘 줄 모른다 찻물에 떠도는 꽃잎들이란지난 시절 한 때우리가 몸을 바꾸었던 꽃나무들이었음에쌉쌀한 차향이 입술을 축일 때마다넘어설 수 없는 어둠이 짙어질 뿐이니 한 번 엇갈린 인연 너무 멀다
어떤 이별 / 전건호 어떤 이별 / 전건호 의정부역에서 부터 옆자리 꾸벅꾸벅 졸던 여자 한탄강 지나면서 내 어깨 기대고 잠이 들었다얼콰하게 술 마시고올라 탄 신탄리행 기차어느 생의 인연인지 고단하기만 하다기차는 들뜬 행락객 싣고 신바람 경적을 울리는데 가는 숨 달싹이며살짝 웃는 듯 어깨 들썩인다 누구와 한 생 엉키는 꿈을 꾸는 건지그녀 단꿈 기웃거리며 고개 돌린 창밖 튀밥 같은 벚꽃 펑펑 터진다머리칼 향기 오롯이 빠져든다 한 생애 엉키며 덜컹대던 기차 차내 방송 종점을 알리자무심히 눈 비비고 일어나잠시 기댄 어깨 까맣게 잊고 개찰구 빠져나와 저만치 멀어간다 어느 길모퉁이에서 다시 만날지 모를 포름한 저 목련
스팸문자 / 전건호 스팸문자 / 전건호 당신의 불청객인 나는향기로운 꽃이라도 되는 냥선정적인 눈길 한 번으로간절하게 매달린다  나른하게 취한 눈시울에얼굴 파리하도록 떨어질 줄 모르는 꽃잎처럼 하롱거린다 어긋난 사랑의 경로들이젖은 눈 깜빡이는 밤천대받는 문장으로누군가의 전부가 되었던 적 있다 나에겐 운명이었으나 너에겐 한낱 스치는 바람 눈 흘기는 네게 달라붙는 나도누군가에게 잊힐 수 없는 사람이었다 네게는 아니더라도누군가엔 전부였던 적 있다 생리혈 보다 붉게 핀 복사꽃그 화무십일홍에 벌처럼 생을 건다
떠돌이 별 / 전건호 떠돌이 별 / 전건호  유성에 흘러들어금성장 화성장 수성장인공위성이 되어 착륙지점을 찾는다어지러운 공전궤도를 떠돌다십이지장 같은 골목 끝에서 하루의 마침표를 찍고 혜성장에 등을 붙인다 숨 넘어 가는 별들의 교성 달력 속 여자가 몸을 비튼다그녀 품에 안겨 꿈속을 헤매다 벽지에 만발한 도화 속으로 흘러간다질펀한 춘화 속으로 뭇 발자국들 비틀비틀 걸어 들어와 코를 곤다 거친 숨소리에 몸 뒤척이다 보면실눈 뜬 여인 손을 내밀고길 잃은 꽃잎에 파묻혀 몽정을 한다빛바랜 벽지에 잠들었던 낙서들다족류의 지네가 되어스멀스멀 허벅지에 기어 오르는데 놀라화들짝 눈을 뜬다흐릿한 창문엔미풍을 타고 수시로 흩어졌다 모이는 꽃별들처녀좌의 치마를 들추다화르르 낙화하는 유성이 된다
살금 살금 / 전건호 살금살금 / 전건호 아내의 히스테리 피해 살그머니 문을 빠져나와 막내와 어둠 저편 낯익은 108호를 관찰한다 정육점 같은 불빛 속에서 내가 요리되었구나 파처럼 잘리고 마늘처럼 쪼개지고 양파처럼 벗겨지다가 후추 한 스푼 뿌려진 채 양념되었구나 아내를 열 받게 하던 후덥지근한 저녁, 드디어 비 내린다 움푹 파인 웅덩이마다 빗물 고여 미사리 밤풍경 같다 비가 오면 마음도 눅눅해지는지 아내는 창틀에 턱을 괴고있다 잠시 전 스트레스 까맣게 잊고 모차르트를 걸어놓고 밖을 본다 어둠속 우리 보일 리 없지만 쉿 엄마에게 걸리면 우린 죽음이예요 막내가 입술에 손을 댄다 방충망 음표처럼 맺힌 빗방울 속으로 그녀, 금붕어처럼 헤엄쳐 들어간다 이제 자유로울 수 있겠구나 네 엄마는 물고기자리로 옮겨갔어 우린 저 물방울 중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