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작 소시집 / 전건호
키싱구라미 외 4편
전건호
입술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입술을 마주대고 사는
물고기의 시간을 일 겁이라 한다면
그 일 겁 동안
길상사 풍경 끝에 매달린 쇠물고기는
윤회의 바다를 몇 번이나 건넜을까
암수가 입맞출 때는 파라다이스였던 산호초가
입술 떼는 순간
바다사막으로 변하므로
그 중 한 마리가 죽으면
다른 한 마리는 따라죽는다
혀끝으로 나눈 말들이
칠년을 상대의 몸속에 머무르며
영혼을 어루만져주는 동안
나는 팍팍한 바다사막의
단세포 플랑크톤이었으므로
내 유일한 소망은
내 고독과 그리움을 암수로 나누고
천년의 진화를 따로 거듭하다가
가장 고독하게 사무치는 어느 어스름
잃었던 두 반쪽이 마침내 만나
입술 닳을 때까지
뜨겁게 키스를 하는 것이었다
*키싱구라미 : 키스하는 물고기
청학리엔 눈이 내린다
내 생명선을 당신의 운명선에 포개자
청학리엔 함박눈이 내린다
폭설이 길을 지워가는 동안
두 개의 굽이치는 강은 하나가 되어
눈 덮인 벌판으로 길을 낸다
허공으로 돌아갈 길 없는 눈발들이
무차별곡선을 그리는 어둠 속에서
우리는 시동을 끄기로 한다
백 년 동안 눈이 쌓이고
천길 빙하가 녹을 때쯤
나는 당신의 강을 떠도는 나룻배
얼음의 눈물에
강줄기가 되살아나고
당신의 염색체들은
내 숨결로 몸을 키운
지느러미 달린 물고기가 되어
푸른 강으로 회귀하겠지
어깨를 기댄 눈송이들이
창문에 붙어 우리를 지켜보는 동안
아무도 우릴 기억해내지 못할 것이므로
강물은 눈 덮인 설원으로 흐르고
이젠 우리 두 손을 놓치 않아도 된다
푸른 신호등의 독백
볼에서 메말라버린 눈물이
어스름 하늘에 눈을 뿌리는 저녁
보고 싶다는 말을 천번 중얼거리니 함박눈이 내린다
내가 허공에 던진 말들은 눈의 포자가 된다
당신이 떠나간 길모퉁이
붉은 눈을 깜빡이는 수은등
한 무리의 불빛이 내 발밑에 떨어져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나를 올려보다 눈을 감는다
바람의 어깨를 보듬어주는 동안
철없이 몸을 던지는 가로등 불빛
눈송이에 부딪쳐 상처 난 어깨를 감싸며
한 점 불빛의 생을 마감할 때
사랑한다는 고백은 방언처럼 지독해진다
방금 전 스러져간 불빛과 나 사이에서
어쩔 줄 모르고 담장에 몸 부딪는 바람 앞에서
내가 살아온 날들이란
어둠 속을 울먹이며 날아오르다
아프게 임종을 맞는 반딧불이
사랑한다는 멈출 수 없는 독백을
지팡이 삼아 여기까지 걸어왔으나
이젠 무디어져버린 오감은
당신의 눈빛 하나만 기다리다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목숨 건 고백을 눈 속에 묻으며 독백한다
30분 동안
당신을 기다리는 삼십분 동안
앙상한 겨울의 나목에서
꽃이 피고 녹음이 푸르더니 단풍이 든다
나는 아스라한 까치집에서
하루 종일 흔들리면서
홀로 부화를 한다
천 번의 폭풍과 먹구름 엄습해도
일곱 빛깔 무지개는 다리를 놓는다
폭설의 눈물이 모여 강을 만들면
나는 당신이 건너오지 못할까 발을 구르다가
당신이 꽃잎보다 가볍다는 걸 알고
안도의 한숨을 쉰다
기다림의 시간이 지층처럼 쌓일수록
까맣게 화석의 꿈을 꾼다
내가 파묻힌 지상
앙상한 이월의 빈터에서
푸른 싹이 꽃망울을 터뜨리면
꽃잎처럼 날아오는 당신을 본다
부탁한다
간밤에 나를 도마에 올려놓고
난도질했다는 사람에게 편지를 쓴다
미안하다.
당신앞에 얼쩡거린 내가 잘못이다
그러나 사람의 길이란
원치않는 곳으로 곁가지를 치고
나는 모세혈관 같은 길을 떠도는
적혈구와도 같이 공연히 뜨거웠던 것이니
너무 나무라지 말라 사정한다
물론 이 한 몸 부지하기 위해
평생 허공에 삿대질을 하고
눈 먼 물고기를 토막내었으니
어젯밤 난도질은 새발의 피라 여긴다
시큰거리는 어금니
침 삼키기 어려운 목구멍
찌르듯 당기는 좌골신경통으로 보아
당신 꿈속에 불려나간
내 혼백의 식은 땀 알만하다
허나 어쩌겠는가
나를 양념으로 삼아 만드는 요리가
당신의 일용할 양식이 된다 하니
그러나, 아직도 가슴앓이 하는 심장만은
도려내지 말라 사정해본다
◈ 시인의 에스프리
사랑, 그 그리움의 실타래
전 건 호
‘어느 날 불같은 사랑이 찾아왔어요.’
독백처럼 울먹이는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가슴 속 사바나에 비가 내렸다. 이 험한 세상, 어지럽게 난무하는 건조한 햇살을 헤치며 타박타박 걸어가는 나를 돌아 보건데 얼마나 무미건조한 삶을 살아왔는가? 민들레홀씨처럼 허공을 떠돌며 마음의 뿌리를 내릴 곳을 찾아 두리번 거려보지만 빈틈 하나 보이지 않는 세상. 아스팔트 깔린 도시의 거리는 물론이고, 들꽃 무성한 숲마저도 내가 비집고 들어갈 공간이 없으니, 저 어느 곳에 내가 뿌리를 내리고 붉게 꽃 피울 수 있을까?
날마다 거울을 보았지만 나는 내 마음 속 풍경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내 마음 속에 누가 엎드려 잠을 자는지, 3600개의 기혈마다 누구의 그리움이 깃들었기에 이렇게 끝없는 사막의 길에서 헤매어야 하는지. 내가 나를 감당 못할 때마다 내 가슴 속 깃들어 나를 조종하는 인연의 뿌리를 들춰보고 싶었다.
간혹 질펀한 사랑을 하던 비몽 중 만난 기억마저 아스라한 꿈속의 여자를 생각하다보면 그녀와 내가 꾸는 각기 다른 꿈의 간극 사이에 충만한 바람은 누구의 애간장을 녹이려고 온 산 진달래를 피우는 걸까?
십 년 전 지리산에 흐드러졌던 진달래에 넋을 빼앗기고 온 이래, 나는 텅 빈 풍선처럼 부풀어 바람 부는 대로 여기까지 흘러왔으니, 그 산 칠부 능선에 남아있는 나 아닌 나와, 이 거리를 헤매는 나 없는 나 사이를 연결하던 바람은 올 봄에도 무정하게 봄꽃을 피우려는가?
사랑한다는 말을 방언처럼 중얼거리다보면 겨우내 눈 덮였던 봉화산을 통째로 불태워버릴 듯 진달래가 피어난다. 그 꽃길을 걸어오는 사람 중 유독 내 혈흔처럼 붉게 피어난 꽃에 넋을 빼앗기는 이를 만난다면, 그와 나의 절벽같이 멀었던 관계 사이에 무지개가 걸리지 않을까?
가수 윤시내가 부른 열애라는 노래가 있다. 처음엔 마음을 스치며 지나가는 타인처럼 흩어지는 바람인 줄 알았는데 앉으나 서나 끊임없이 솟아나는 그대 향한 그리움, 그대의 그림자에 쌓여 이 한세월 그대와 함께 하나니, 그대의 가슴에 나는 꽃처럼 영롱한 별처럼 찬란한 진주가 되리라. 그리고 이 생명 다하도록, 이 생명 다하도록 뜨거운 마음속 불꽃을 피우리라. 태워도, 태워도 재가 되지 않는 진주처럼 영롱한 사랑을 피우리라. 그리고 이 생명 다하도록 이 생명 다하도록 뜨거운 마음속 불꽃을 피우리라. 태워도, 태워도 재가 되지 않는 진주처럼 영롱한 사랑을 피우리라.
국가고시를 준비하다 거듭 낙방의 고배를 마시고 논산훈련소에 입대를 했던 80년대, 일요일 종교 활동시간에 조교들의 눈초리가 무서워 훈련소사찰인 연무사 법회에 참가했다. 하나 씩 나누어주는 초코파이에 감동하며 연단을 바라보고 있는데, 법회를 주관하는 법사가 훈련병들에게 윤시내의 열애를 합창할 것을 주문했다. 한 번 뿐인 여러분들의 인생을 불같이 뜨겁게 살라며 그 분이 선창을 하고 우리가 따라 노래를 부르는데, 두 볼에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진정 목숨 바쳐 사랑을 해보았는가? 어느 한 사람은 물론, 어떤 수단과 목적을 위해 혼과 육신이 다 타버리는 열애를 해보았는가? 돌아보니 뜨거운 사랑 한번 못해본 녹슨 전차와도 같은 나를 연민하듯 눈물이 흘러내렸다.
법회를 끝내고 오와 열을 맞추어 행진하는 연무사 연병장엔 지독하게도 붉은 사르비아가 흐드러지고 그렇게 구월의 지독한 열병은 훈련소 입영기간 내내 나를 불태웠으나, 아직도 내가 남긴 달력의 빈 칸마다 채우지 못한 회한과 그리움을 무엇으로 다 채울 수 있을까?
나는 꽃 중에서 쟈스민을 좋아한다. 소심한 청년이 차갑도록 아름다운 여인을 위해 들판에 나가 꽃을 꺾었지만, 용기가 나지않아 꽃다발을 가슴에 안고 그녀의 창만 바라보다 죽었다는 쟈스민의 슬픈 구전이야기가 아닌, 온 생명을 다 받쳐 열애를 불태우는 청년의 환생이 되어 남은 생을 불같이 뜨겁게 시로 풀어내며 돌아보지 못한 내면의 길로 여행을 떠나려 한다.
마음 속 깊은 오솔길에서 나를 기다려온 사람을 이제라도 찾아가 두 손 꼭 그러쥐고 그의 가슴에 맺힌 그리움의 실타래를 풀어야 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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