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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건호시

마름꽃 우화 외 1 / 전건호

마름꽃 우화

 

전건호

 

삼백년전 아내를 만난다

칠남매를 낳았고

내 병수발에 허리 꼬부라졌던

여자와 마주앉아 백화차를 마신다

 

찻잔에 떠도는 백가지 꽃잎마다

삼백년전 세석평전의 바람이 인다

 

그녀가 찻잔에 시선을 떨구고 있음은

반사되는 지난 삼백년전의 하루를 쳐다보고 있음이라

주마등 같은 과거지사앞에

잘 살아왔노란 말 한마디

서로 묻지않기로 한다

 

수세미덩쿨 같은 자손들이

업둥이를 낳고 퍼뜨려

마름꽃처럼 세월의 강을 덮고

그 꽃잎으로 찻물을 우리면서

서로 손 내밀어 그러쥘 줄 모른다

 

찻물에 떠도는 꽃잎들이란

지난 시절 한 때

우리가 몸을 바꾸었던 꽃나무들이었음에

쌉쌀한 차향이 입술을 축일 때마다

넘어설 수 없는 어둠이 짙어질 뿐이니

 

한 번 엇갈린 건 너무 멀다

 

 

 

 

 

 

 

 

진화를 꿈꾸던 노량진의 저녁

 

 

 

23.5도 기운 내 마음의 부엽토에

당신의 말은 풀씨처럼 날아와 뿌리를 내렸다

 

손가락 끝 저리게 찾아온 저녁은

옆구리 쓸쓸해지는 어둠을 부르면

형체 없는 흙으로 풍화되는 발자국앞에

허리를 푼 의혹이 검은 유두를 내밀었고

밀려드는 허기는 절개지같이 아득했다

 

창틀까지 올라온 나팔꽃

수술에 맺히는 가로등 불빛이

변제할 길 없는 내용증명처럼 음울했다

 

가방을 챙기던 거울 속 사내의 눈 속에

성긴 빛의 포자들이 넝쿨로 자라나

혼곤한 초저녁의 허공에서 나를 칭칭 감았다

 

내 생의 주기율표를 다시 설계해 주세요

아무리 외쳐도 시간의 염색체들은

꼬리달린 여우와도 같이 수시로 모습을 바꾸고

 

황홀한 구름 속에 머리 내민 낮달을 바라보는

동공 속으로 철없는 서른 개의 발자국이

성큼 성큼 들어설 때마다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한숨만

꼬리 잘린 도마뱀처럼

녹슨 횡단보도 저편에서 발을 굴렀다

 

 

2013 애지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