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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건호시

비등점위의 사랑 외 2 / 전건호

비등점위의 사랑

 

전건호

  

 

휘발성 안개 자욱한 밤

불티처럼 어둠의 한복판을 질주하던 나는

이 별의 시한폭탄

 

담벼락에 그려진 낙서들이

수동형에서 능동형이 되도록

나를 버린 접속사들을 달래며 집착했다

 

나는 무중력의 궤도를 떠도는 떠돌이별

 

글자들이 지시하는 대로 행진을 하고

운명을 조망해주는 별빛을 따라 떠돌았으나

돌아보면 또 그 집 앞이었다

거미줄 같은 길들이 나를 가둘수록

휘발성 어둠 가득 찬 마음은

아직까지 내가 포기할 수 없는 사람이 남긴

글자들에 조종되고 사육되었다

유일한 좌표란 어둠 속

나를 바라보던 그 눈빛

자정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석유처럼 흥건한 어둠에 몸을 맡기다보면

그를 향해 흐르던 강물이

바람과 시간의 경계에서 하얗게 멀어져 갔다

 

내가 쓰다버린 백만 개의 파지들이

구원의 나룻배처럼 흘러올 거 같았다

 

 

 

 

 

  

골절된 시간

 

 

 

팔다리에 상처가 난 시간을

반창고로 둘둘 만 채 끌고 온 바람은

나를 쉽사리 용해시켰다

 

자꾸만 하류로 밀어냈으므로

끊어지려는 걸음을 절뚝이며 오래 아팠다

불구의 몸 안에서 열망의 시간들이 분해되었다

 

마음의 토사를 모아 둑을 만들었으니

지나온 시간의 부유물이 수면을 덮었다

수많은 지류들의 발목을 잡은 저수지에

발자국들이 수몰되면서

둘이 걸어온 길은 어류들의 항로가 되었다

 

수면을 가위 누르는 달빛에

우울과 고독이 돌연변이를 해

지느러미 키운 물고기들이 포획되는 동안

나는 조용한 파문을 그리는 달빛에 몸을 맡기는

물풀이 되어 조용히 흔들렸다

 

거센 시간의 흐름을 만드는

강의 상류를 골똘히 생각할수록

생각의 궁극에서 피어나는 꽃잎들

 

이슬 속에 갇힌 지난날들은

미토콘드리아 같이 당신에게 구부러졌다

골절된 시간의 허리에 매달려서도

당신을 추억한다는 사실만으로

잡힐 듯, 기다리던 안부들은 물풀처럼 키를 키웠다

 

붕대에 둘둘 말린 아홉 개의 꼬리를 단 욕망들이

거친 부들꽃대를 밀어올린 채 흔들렸다

 

 

 

 

풍선놀이

                         

 

빨주노초파남보

나는 오색빛 고무풍선

당신의 입술만 스쳐도 부풀어 올라요

 

둥글어지는 만큼 한 세상 들어 올리고 싶어요

하늘을 수놓는 풍선들과

어깨 나란히 구름을 향해 둥둥 떠오르는 거죠

 

칼바람 님바람 돈바람 신바람

에 부풀어

하늘로 날아오르는 기분을 아시는지

 

티끌처럼 지상은 아득해지고

결코 넘을 수 없던 산들이 구겨진 이불같이 펼쳐질 무렵

눈을 현혹하던 구름위로 날아오르다

헌옷처럼 추락해 거리를 뒹굴던 기억 수도 없어요

 

허공엔 바람으로 부푼 풍선들로 붐비고

허파에 바람 든 지상의 시선들이 시샘을 해요

 

알록달록 구름위로 고개 내밀다

발그라니 달아올라 터져버린 몸

널브러진 노숙자의 눈 속으로 사라지길 반복할지라도

바람 부는 세상이 따뜻한 걸요

 

지긋지긋 허기진 당신들

터질 듯 바람 한번 불어넣어 드릴께요

달의 뒷편까지 날아보세요

 

 

2013 시와 미학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