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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건호시

[스크랩] 낙엽 외 5편 / 전건호

(시문학12월호전건호특집)

 

낙엽

                                        전 건호

 

 

 

 

입술을 깨문 침묵위로 빨간 신호등이 켜졌다

 

비행을 마친 언어들이

어둠의 바닥에서 눈을 감는 저녁

날아오르던 새들도 공중에서 흩어졌다

 

죽은 말들과의 여행길

 

작별인사도 하지 못하고 떠나온 말들이

거친 물살 저편에 창백하게 부유했다

푸른 별에 남겨둔 사람과

목숨 다한 고백을 마무리도 못하고

쫓기듯 올라타야 했던 기차

 

얼음 같은 손들이

울부짖는 영혼들의 등을 떠밀고

눈물 마른 독백들이

살아남은 자의 비탄에 쌓여

장송곡처럼 차창에 매달리지만

우리가 탄 열차 안을 결코 넘볼 수 없으므로

기차는 검푸른 야마천을 지난다

 

차창에 밎혀 심금 울리던 이승의 빗방울 속에

지상에서 날아온 비탄의 곡소리들이

은하로 떠나는 열차 창문에 둥글게 달라붙는

죽은 말들이 증발하는 영혼의 시간

빛바랜 가슴 마다 흔들리는 눈빛은

점멸등에 갇혀 길을 잃는다

 

 

 

 

 

 

이별의 편지를 개봉하는 저녁

 

 

 

막다른 골목을 떠돌던 비눗방울이

차가운 눈빛에 순간 응고되어

촉 나간 백열등처럼 터지기 시작한다

 

행간과 행간은 절벽처럼 가파르고

비눗방울에 갇혀있던 공기의 비명에

서성이던 바람이 대문을 밀치고

식어버린 당신의 그림자를 수색한다

 

밀가루 같은 눈발에

내게로 날아오던 말들이

10미터 전방에서 결빙되는 시간

싸락눈으로 길바닥을 뒹굴며

네게로 향하던 내 눈빛은 얼음꽃으로 피어난다

 

마음 속 깊이 타오르던 불꽃이

혹성의 심층부에 갇힌 마그마처럼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하는 혹성의 표면

 

백년만의 폭설에 길 잃은 시선은

머물 곳 찾지 못한 노숙자처럼

지상으로 몸을 던지는 눈발을 검색한다

 

검은 눈동자 속 밀봉되어 있던

그림자의 눈동자 속으로

마침표를 찍듯 떨어지는 눈발

 

이별의 깊이는 폭설에 갇힌다

 

 

 

 

 

 

 

 

마침표, 그 깊고 먼

 

 

 

머리끝까지 날아오른 가창오리와

발바닥까지 추락한 물닭이

둥근 허공을 입에 문 채

자작나무 수피 같은 마음 속으로 파고들었다

 

앞산 뻐꾸기가 심장에 머물자

그리움의 깊이를 헤아리던 두 귀는

레이더처럼 쿵쿵 심장을 관찰했다

 

골조만 남은 폐가에서 풀려난

바람의 포구로 차를 모는 동안

파도의 주름을 촘촘하게 누비는 햇살

눈앞을 선회하는 구름의 깃털에 매달려

눈썹까지 날아오르고 싶었으나

윗새오름에 발목이 잡힌

열대성 저기압은 소나기를 쏟는다

 

육지로 가는 배는 끊긴지 오래

뻐꾸기의 허공이 바다의 허공과

눈썹위에 겹쳐질 때마다

잊을 수 없는 눈빛은

출구 없는 바다에 붉은 저녁을 수놓는다

 

가슴 저미게 하던 눈빛 한 줄기

거침없는 소용돌이를 만들어

육지로 가는 뱃길을 막는다

 

 

 

 

 

 

 

49개의 간이역을 통과한 세일즈맨

 

 

 

담쟁이 넝쿨 위를 달리는 전철이

로봇인형처럼 비틀거렸다

 

마른 풀잎 같은 소음 속에서

도 개 걸 윷 모

각기 다른 내가 백 개의 눈망울에 빠져

풀리지 않는 매듭처럼 허우적거렸다

가라앉았다 떠오르기를 반복하는 내가

손에 손을 잡고 모퉁이를 견디며

헝클어진 나를 복원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쏟아버린 팝콘처럼

텅 빈 방식으로 품셈을 하는 낡은 의자들

공백으로만 기록되는 비명들이

해법 없는 소멸의 방정식이 되어 식어갔다

 

점점 우스꽝스러워지는 공중전화기처럼

나비 같은 평판을 손에 쥐고

나는 자꾸만 어긋났다

 

꽃가루처럼 날리는 뭇시선들앞에

기형적인 낱말들이 꽃누르미가 되어 고개숙였다

 

오십가지 색깔로 몸을 바꾸었으나

그 때마다 49개의 모순이 야유를 보냈다

 

보호색을 펼쳐낼수록,

미친 듯 지하철 파열음이

심장에 균열을 만들어가는

 

 

 

 

 

 

 

 

판도라상자

 

 

 

하루에 하나씩 부화되는 상자를 내시경 한다

 

치명적인 사랑에 빠질 시간을 저울질하던

외눈박이 별자리는 구름에 몸을 감추고

계시와 신탁의 말씀은 궤변이 된 지 오래

 

오늘과 내일의 한계선에

신은 지독한 최루액을 뿌린다

내일은 오늘이 되고 다시 어제로 함몰되었으나

지나간 시간은 단물 빠진 껌처럼 밍밍하다

 

부화 직전의 알을 두드린다

생을 송두리 째 휘감을 운명의 사람은

개봉되지 않은 달력의 어디에 있을까

 

그녀는 바람의 딸

 

넘기지 못한 달력의 뒷장 어딘가

물결무늬로 출렁이는 파문을 향해 돌을 던진다

 

밀봉된 상자에서 사금파리처럼 돋아나는 귀

 

잃어버린 신발 한짝을 기다리는

낯선 문장처럼 어두운 방안에서 확장되는 눈

쉼 없이 허공의 상자를 개봉하는 초침소리가

탈색된 햇살의 지문을 재단한다

 

 

** 2013 시문학 1월호 특집

출처 : 시에/시에문학회
글쓴이 : 전건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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