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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건호시

그림자의 표정 외 4 / 전건호(2012 열린시학 가을호 특집)

 

 

 

그림자의 표정

 

 

 

고로쇠 수액을 마시고 난 후

팔다리에서 싹이 났다

물음표처럼 잎이 피어나고 잔가지가 돋아났다

무연고의 바람앞에 새들의 울음이 매달리고

바람은 관절틈에 둥지를 틀었다

 

나는 구름의 눈빛에 흥건히 젖었다

무럭무럭 자라나는 더듬이가

새들이 날아가는 방향으로 가지를 뻗었다

 

사람들은 내게 빨대를 꼽았다

슬픔이 여러 겹으로 복제되었다

그들의 DNA와 교잡된

나이테들이 그들의 뇌가 되었다

검은 주근깨들이 진화된 그들의 얼굴이

표정없이 나를 쳐다봤다

 

그들의 숨소리가 내 몸을 누빌 때마다

가지끝에 아기집이 맫혔다

사랑했던 사람이 천명이나 복제되었다

나를 둘러싼 꽃들이 눈 맞춘 별을 찾는 자정

머리맡 흔들리는 나뭇잎에 천개의 별빛이 발자국을 찍었다

 

주근깨에 숨겨진 사연을 바람이 해독하는 사이

불안하게 깜빡이던 별이 머리맡 떨어졌고

얼어붙었던 당신이 내 몸의 혈관을 타고

관절에 바람의 집을 짓는다

 

 

 

 

 

 

 

네일 아트 고양이

 

 

 

천년을 기약하는 커풀링의 약지에

고양이를 입양했어요

 

아침에 눈을 뜨면 죽었니 살았니

무슨 일이라도 밤새 생겼을까

물이라도 튈 새라 신경을 곤두세우는 데요

오늘은 양치를 하다 약지고양이의 귓불을 떨어뜨렸는데요

환청처럼 달팽이관에서 매미가 울고

잠시 실어증에 빠진 기억도 있어요

 

덕분에 생쥐들은 얼씬도 못하죠

잠이 들면 쫑긋 귀를 세운 고양이

거미줄 같은 신경세포를 순찰해요

 

검지는 밖을 지키고

약지는 안을 지키는 수문장

살금살금 꿈의 언저리를 야옹야옹 순찰할 때마다

거미줄 같은 혈관은 고양이들의 사파리

 

손톱이 자라날수록

공중부양 된 고양이가 지상을 단층촬영하는 데요

 

미래의 어느 날

손톱에서 나를 수호하던 고양이들도 외계행성으로 떠나가겠죠

 

생쥐들이 왕국을 넘볼 때마다

앙칼진 고양이 입양해 놓고 잠시 숨 고르다보면

여지없이 떠오를 반달

그제야 손톱을 떠난 고양이는

아뿔사, 내 목젖에 올라붙어

갸릉갸릉

 

 

 

 

 

 

 

소문의 오후

 

 

 

그들은 나를 인수인계 했다

고무신이 운동화에게

구두는 장화에게로 핑퐁을 쳤다

 

내 소유물이라 믿었다

내가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주는

수단일 뿐 이라 믿고 과소평가했는데

진땅 마른 땅 가리지 않고 몸을 던지던 부장품들이

언제부터인가 인공지능형이 되어

머리꼭대기에 올라탄다

 

신발장에서 나는 가장 어두운 소문이 된다

 

나를 진흙에 빠뜨린 구두

억지로 절벽에 매달리게 한 등산화

빈 깡통을 걷어차던 운동화

분노로 뒷굽이 닳은 작업화들의

꽉 찬 배신에 잘근잘근 씹힌다

 

밤잠 설친 고양이가 자정의 문턱을 넘어

신발장을 긁으며

나를 요리하느라 여념이 없는데

간이 부은 나는

또 다른 입양의 꿈을 꾼다

 

 

 

 

 

 

 

 

 

 

 

 

 

녹슨 바다

 

 

? (물음표)에 매달린

. (점) 하나가 부풀어 바다가 되었다

 

문득 밀려오는 바다라는 말

 

미처 거두지 못한 꽃들은

태풍에 떠밀려온 미역줄기처럼 발목을 감는다

달도 별도 없는 바다에서

몸을 의지하던 배는

포구로 돌아올 실마리를 찾지 못하는데

고개 한번 갸우뚱 하는 순간

폭풍우는 지상의 모든 불빛을 삼켜버린다

 

둥근 바다가 만든 포말 같은 의혹도

허공에서 검은 점 하나일 수 있지만

삐걱거리는 갑판에 던져진

난파직전의 생과 사

한 몸이 되어 SOS를 친다

 

갈고리 같은 의심에 떠밀려온 달의 표정은

당신이 나를 바라보던 순간의 눈빛처럼 차가운데

이 난바다에 배를 띄우고

물음표 깜빡이는 당신앞에 다시 설 수 있을까

 

하얀 날을 세운 바람이

물음표 머금은 파랑을 만들어

의혹으로 가득찬 . (점)을 뿌려대는데

미지수의 바다를 붉게 태우는 노을을

식혀줄 밀물은 언제쯤 발목을 적실까

 

 

 

 

 

 

 

 

 

 

 

해부학 교실

 

 

 

막다른 골목까지 일방적으로 나를 밀치는

바람의 명치에 회심의 카운터를 먹인다

갈비뼈가 부러지고 심장이 파열된다

출렁거리는 숨소리를 뒤로 하고

편견의 벽을 벗어나려는 순간

몸을 합체한 바람의 혀에 녹아든다

 

식도를 지나 위장으로 접어들자

환하게 열리는 지하광장

코트깃 세운 사람들 등을 돌리고

피돌기 낭자한 내장은 무수한 미로를 열고

내가 뱉은 실언과 한숨은 물컹한 나자식물이 된다

 

소화되다 만 말들이 역류할 때마다

걷잡을 수 없이 웃자라는 덩쿨식물

 

난기류 소용돌이치는 위장에는

바람에 녹아 있는 독설들이 무기질과 섞여 소화된다

 

출구를 찾아 x- 레이를 찍지만

바람은 어느새 먹구름을 불러 시야를 가린다

후각을 자극하는 낯익은 살내음

거미줄 같은 신경선을 따라가면

명치에 회오리치는 비바람 속

거부할 수 없는 저 손짓

어디서 보았던 눈빛일까

 

 

 

2012 열린시학 가을호 특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