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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건호시

[스크랩] 칼국수

                                                전 건호

 

 

동의를 구한 적은 없다

수다를 떨다 허기지면

그의 부재를 핑계 삼아 물에 풀어 버린다

소금 간을 하고 주물럭 주물럭 반죽을 해

홍두깨로 넓적하게 밀어

무채 썰 듯 칼질을 한다

칼날이 지날 때마다

그는 영문도 모르고

수백수천 가닥으로 썰어진다

펄펄 끓는 뜨거운 입담 속

비웃음과 조크가 곁들인다

뜨거운 객담 속 면발

풀리지 않게 쫄깃거릴 때까지

욕설과 비아냥의 군불로 끓여

젓가락 부딪치며 후루룩거린다

포만감이 밀려오면 일말의 거리낌 없이 흐뭇하게 자리를 뜬다

그가 더부룩하게 내장을 통과하는 동안

역한 트림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면발의 감칠맛에 편식을 그칠 수 없다

거푸집만 남은 그가

영문도 모르고 반편이같이 다가오면

친한 듯 머리 맞대고

누구를 반죽할까 궁리한다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09 5-6월호

 

 

 

* 내게 상처 입은 꽃들은 얼마였던가? 나는 이유없이 누군가를 칼질하며 살아왔다. 내가

도달하지 못할 거리에 있는 그들을 시샘하며, 까치발을 뛰어도 따라갈 수 없는 그들에 대한

열등감은 항상 나를 곁눈질하게 만들었다. 불가의 법이 아니더라도 수미산같이 쌓아놓은 내

업을 무었으로 해량하랴. 이 시는 차라리 내 부끄럽게 살아온 고백이라 할 것이니 그럼에도

이 순간 나는 누군가를 또 반죽하고 칼질하는데 게으르지 않으니, 이 시 또한 얼마나 위선

으로 가득한 것인가? 날마다 내가 즐겨먹는 칼국수처럼 우린 끊임없이 누군가를 반죽해

칼질하는데 익숙해있지 않던가?

 

출처 : 시와비평문학회「두레문학」교과연구회
글쓴이 : 전건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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