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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건호시

눈 먼 새들의 사각지대 / 전건호

눈 먼 새들의 사각지대

                                  전 건호

 

 

 

 

한 치 앞을 분간 못하는 나와

등잔 밑이 어두운 당신

눈만 뜨면 채널을 다툰다

 

자막이 보이지 않는 나는

눈 뜬 장님이 되어 인상을 찌푸리고

바늘귀 못 꿰는 당신은

내 신문 활자에 까막눈이라

 

손톱을 물어뜯던 오랜 습관 대로

마음을 들볶는 인파이터와

먼 산만 바라보는 아웃파이터의 시계는

극과 극으로 벌어지고

이정표를 못 읽어 삼천포로 빠진 날들 깊어만 간다

 

서로 날을 세울수록

캄캄하게 밀려드는 계단

실밥 풀린 줄도 모르는 당신이 눈치 주는 사이

어두운 미로의 소실점에서

헛발 디딘 달이 기운다

 

눈앞 풍경이란

끝이 닿지 않는 그늘로 파고드는 골목길

서로를 느끼는 방정식이란

앞서거니 뒷서거니

저만치 떨어져 걸어야 한다

 

집착할수록 어둠만 넓어진다

 

 

 

 

 

 

 

천년의 여행

 

 

가늠할 길 없는 그대를 내시경하는 중이야

 

내게 상처 입은 나무들이 풍향계를 조종하는

길 아닌 길에서

스콥에 몸을 감춘 미립자가 되었어

어둠 속 떠돌던 빛의 입자들이

발길 한번 닫지 못한 심혈관을 조명했지

 

눈길 닿는 곳마다

잠에 곤하던 염색체들 황망하게 눈을 부비고

엎드려 있던 DNA들

불현 듯 잠에서 깨어나 날개를 달더군

 

일제히 손짓하는 무량수의 달맞이꽃

깊은 오령 속 노란 날개를 모으는 순간

가녀린 꽃잎의 떨림에도 눈물이 고였어

꽃잎을 들여다 볼 때마다

부풀어 오르는 풍선처럼 심장은 고동쳤고

구불구불 혈관을 누비는 백혈구들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점등되었어

 

횡경막을 넘어서자 눈 한번 깜빡일 때마다

모세혈관에 안간힘으로 매달려 피어난 꽃잎들

눈꽃처럼 날리는 터널이 열리고 몇 안 되는 빛의 입자들

하얀 손을 내밀어 어둠 속 길을 인도했어

돌아갈 길 아득한 십이지장을 지나

눈빛 하나에도 초롱꽃 만발하는 들판에 이르는데

그대 가슴을 빙빙 맴도는 낯익은 숨결 한 점이

우기를 부르고 있었어

 

 

 

 

2012 리토피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