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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건호시

[스크랩] 빅뱅을 중계하다 외 4 (시와경계 여름호 특집)/전건호

빅뱅을 중계하다

                                             전 건호

 

 

 

여기는 곤륜산 천문대입니다

지금 한반도 상공을 떠돌던

먼지 하나가 포말처럼 팽창하고 있습니다

천억 개의 별이 되고

일억의 성단으로 분열 중입니다

먼지 하나에 모아졌던 시선이

까마득히 멀어지고 있습니다

모서리가 하늘과 땅만큼 멀어지고

손끝 반응점만 자극해도 두통이 멎던 시간들이

칼로 도려내는 심장의 통증으로 맺힐 뿐입니다

먼별까지 날아가 버린

그렁한 눈망울을 찾아

전파망원경은 은하를 탐색 중이지만

간헐적인 신호만 난무할 뿐

옷깃을 여미는 찰나에도 별들은 일억 광년씩 이별입니다

나와 당신을 관통하던

시간의 동굴은 이미 비틀려 버렸습니다

오백 년 느릅나무의 검은 구멍이 토해내는

안개 점점 자욱하기만 해

영영 만나지 못할 예감으로 망원경엔 이슬 자욱합니다

운행경로를 잃은 별들이

지평선 너머로 눈물방울 남긴 채 몸을 던지는 중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꼭 잡고

생중계되는 방송에 귀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지금 손 놓치는 이 하나라도 있으면

지구별 무량수로 분열할지 모를 일입니다

다시 만나 손잡을 날

몇 겁이 될지 가늠조차 할 수 없습니다

 

 

 

접속

 

 

그녀와 마주치는 순간

아찔한 현기증에 푸른 눈동자 속 발을 헛디뎠어

 

얼마나 가라앉았을까

캄캄한 어둠 속 혈관을 떠돌다가

자욱하게 일어서는 아지랑이를 타고

너울너울 허공으로 떠올랐어

 

아스라이 가물거리는 지상

하롱하롱 떨어지는 꽃잎에 갇힌 사내

깊은 밤 시를 쓰다 잠에 곤한데

연필은 나비들의 파장에 춤을 추는거야

 

하얗게 날리는 꽃잎 수미산을 이루고

길 잃은 나비들

백지위에 싹트는 시어를 읽다

혼곤한 꿈 속 날아드는데

하염없이 떨어지는 꽃잎

백년의 혼곤한 꿈을 부르는 거야

 

나비들 날리는 슬픔의 노란 꽃가루

연옥 같이 날리는 꽃잎에 앉을 때마다

환형동물처럼 깨어난 시들은

나를 휘감아 백년의 꿈 속

아득하게 휘몰아 가는 거야

 

 

 

 

갈라파고스

 

 

찌륵찌륵 꽃대를 세우는

풀벌레 울음을 꺾어 논두렁에 심는다

 

이슬처럼 촉촉한 달빛에

귀뚜라미 울음 나팔꽃 줄기로 무성하고

화들짝 웃음꽃이 걸린다

달이 차고 이즈러질 때마다

십년 전 당신이 흘린 웃음을 파종한다

 

석달열흘 뜬 눈으로 지새며 싹트길 기다리니

천정에서 별이 쏟아진다

눈 맞추던 별들이 바람과 몸을 섞을 때마다

구슬피 우는 뻐꾸기울음에 때죽꽃 날린다

 

꽃잎에 파묻혀 오령의 꿈을 꾼다

겨드랑이 스멀스멀 날개 파닥이며

황도를 넘나들다 깨어난다

 

이마 깊은 고랑

흥건하게 흘러드는 달빛에

부풀어 오른 풀벌레울음

달팽이관 가득 무성한 바람을 타고

혈관을 한 바퀴 돌 때마다

강물에 비친 그림자

카멜레온의 유령이 된다

 

 

 

 

미완성 교향곡

 

 

 

아스팔트에 그려진 오선지

노랑과 흰색 실선을 넘나들며

3단 고음 도래미파를 부른다

 

바람이 악보를 휩쓸 때마다

빗나간 약속들로 들끓던 거리

내가 짝은 온음과 반음은

3악장 알레그로에서 흔들리네

 

옷깃 펄렁이는 바람

발목을 휘감아 등을 떠밀고

모래알 같은 음표

옮겨 적지 못한 노래들은

아리아가 아닌 불협화음이라

 

나의 출현에 먼발치

실눈 내려뜨고 배시시 웃는 쇼윈도 여자들

몸을 비트는 오선지

고무줄놀이 하듯 찍어온 발자국

앙상블 이루는 날 언제일까

 

삶의 교향곡에 끼어들지 못한 쉼표들

겨울나그네 넘쳐흐르는 눈물이라네

 

 

 

* 겨울나그네 넘쳐흐르는 눈물 : 슈베르트의 자화상을 그린 연가곡

 

 

 

 

 

고마운 세상

 

 

오빠 연락주세요

묘령의 여인들이 수시로 만나 달라

애타게 추파를 던진다

조건없이 즉시 오천만원 무담보로 빌려준단다

심지어 멀리 제주도에서 냉장고를 받아가란다

오늘은 동남아 여행을 보내준단다

 

고맙다

줄 게 없는 나는 항상 미안타

오지에 묻혀 사는 나를

돕지못해 안달이 난 사람들

온 세상을 밝히고도 넘쳐

초막까지 보살피는 달빛

옹벽을 타고 올라 방긋거리는 나팔꽃

 

세상은 품앗이라는 듯

내게 호의를 배풀려 애를 쓰는데

담을 그릇이 너무 작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가

미안할 따름이다

 

 

2011 시와 경계 여름호 특집

출처 : 시에/시에문학회
글쓴이 : 전건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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