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모콘에 조종당하다
전 건호
핸드폰을 찾던 아내가
가방에서 리모콘을 꺼내들고 씩씩거린다
이렇게 된 게 당신 탓이라며
리모콘을 흔들자
주변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변한다
별이 파득파득, 달이 떠오른다
나는 바쁘게 분장을 하고
그녀의 지시에 따라
널뛰기하듯 연기를 한다
내가 연기하는 채널이 맘에 들지않는지
쉴새없이 리모컨을 눌러댄다
자판을 누르는 손가락을 따라
새가 되고 나무로 흔들리다
어릿광대가 되어 곱사춤을 춘다
채널을 옮겨다니느라
헐떡대는 나를 안중에도 없이
리모콘을 계속 눌러댄다
분장할 틈도 없이
토크쇼를 하고 노래를 부르고
물구나무서기를 하다 보면
봄꽃 피던 세트장엔
붉은 단풍 팔랑
노란 은행잎 포도를 뒤덮는다
고객만족 시대
이마트 담장에 매달린 덩쿨장미
무표정하게 서있다
눈 마주치자 방긋 웃는다
분주한 거리 멀거니 바라보다
물색없이 사람들 다가와
사진을 찍을 때면
렌즈앞 실룩거리는 얼굴처럼 향기없이 웃는다
샐쭉 토라졌다가도
눈 마주치면 싱긋
피곤한 듯 벽에 기대섰다가도 빙긋
잘 훈련된 모델같이 포즈를 취한다
오월 한 달은 바겐세일하듯 꽃 활짝 피워야
가시덤불에 불과한 종족
살아남을 수 있다는 구전 잊지않았는가
거꾸로 매달려서도
오월이면 일제히 피어나
눈 마주칠 때마다 방긋 웃는다
몸을 꼰다
09 시에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