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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연적 자아에 대한 욕망, 보다 근원적인 것에 대하여/전건호 시집변압기

명인사업단대표 2011. 4. 14. 09:54

본연적 자아에 대한 욕망, 보다 근원적인 것에 대하여

- 전건호, 『변압기』

                                                                                    대전대 교수 박진희

 

 

인간의 삶은 욕망에 의해 구동되고 있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물론 종교적 관점에서 해탈에 이르기 위한, 혹은 절대자에 다가가기 위한 구도의 과정이 이러한 욕망에서 벗어나는 훈련이라 항변할 수 있겠지만 이러한 구도의 행위 또한 욕망에서 자유롭고자 하는 또 다른 ‘욕망’을 노정하고 있게 되는 셈이다. 그 욕망의 대상이 속적인 범주에 존재하는 것인지, 탈속적인 세계에 속하는 것인지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산업화로 인한 자본주의의 가속화는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으로 하여금 속적인 범주, 구체적으로 자본의 확보 내지 증식에 욕망을 집중시키도록 추동한다. 그러므로 현대 개인을 규율하는 견고한 권력은 이러한 욕망과 결부되어 있는 자본주의적 일상이 되는 것이다. 자의적이자 타의적일 수밖에 없는 개인 혹은 사회적 차원의 자본주의적 욕망, 그리고 그러한 욕망과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자본의 시스템은 인간이 현대를 살아가는 한 거부하기 힘든 ‘힘’이라 할 수 있다. 현대의 개인이 거대한 자본의 메커니즘이라는 기계에서 부속품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됨을 인식하면서도, 거기에서 빠져나오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며, 오히려 그러한 시스템에서의 배제를 두려워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전건호의 작품 「거라」는 이러한 현대의 ‘세계와 자아’와의 관계를 적실하게 보여주는 시이다.

 

원반 같은 운동장 이 악물고 뱅뱅 돌다가 숨 가빠 그만 멈추려는데 두 다리가 제멋대로 뱅글거리는 거라 힘들어 죽겠는데 멈춰지지 않는 거라 내가 달리는 거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운동장이 멋대로 나를 굴리는 거라 공깃돌처럼 톡톡 튕기는 거라 하도 기막히고 어이없어 가쁜 숨 할딱이며 생각해보니 여기까지 온 게 내 의지인줄 알았는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거라 바람이 이리저리 나를 이끌었고 길들이 나를 둘둘 말아 꾸역꾸역 소화시켰던 거라 알지 못하는 힘이 나를 원반 속에 밀어 넣은 거라 누군가 공깃돌처럼 나를 굴리며 즐기고 있는 거라 평생 쳇바퀴 돌고 돌면서도 꿈에도 눈치채지 못한 거라 이제야 그걸 깨닫고 트랙을 뱅뱅거리면서 담장 밖 흘겨보며 씩씩거리는데도 쳇바퀴 속 다람쥐처럼 멈출 수가 없는 거라

 

「거라」전문

 

위 인용시에서 세계는 ‘원반 같은 운동장’이다. 처음 이 세계를 ‘이 악물고’ 돌고 있는 것은 화자 자신이었다. 즉 자아의 의지에 의해서였다는 의미이고 화자 자신도 줄곧 그러하다고 믿어 왔다. 그러나 ‘힘들어 죽겠’는 상황에 달하여 화자는 멈추려 했으나 이젠 ‘운동장이 멋대로’ 화자를 굴린다. 화자는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지만 ‘여기까지 온 게 내 의지’가 아니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다. 위 시에서 구체적인 자본주의적 일상이 드러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견고한 힘으로 자아를 규율하고 있는 질서체계와 그 속에서 ‘쳇바퀴 속 다람쥐처럼 멈출 수 없는’, 진정한 주체가 될 수 없는 자아에 대한 황망함을 발현하고 있다. 이러한 시인의 내면은 시의 형식적 측면을 통해서도 표출하고 있다. 즉 위의 시는 행이나 연의 구분이 없고 ‘거라’라는 동일한 종결어의 반복으로, 화자의 진술을 쫓아가는 독자는 마치 ‘쳇바퀴 속의 다람쥐’와 같은 화자의 현실에 동참하고 있는 듯, 숨가쁜 반복을 체험하게 된다.

 

이렇게 인간 존재가 본연적 가치를 상실하고 기계의 부속품과 같은 위상으로 추락한 현실에 대한 시인의 인식은, 위의 시 외에도 「송충이」, 「수세미에 접붙이다」, 「지천명」, 「견본품」, 「묘수를 찾아서」와 이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변압기」등 많은 작품들에서 발현되고 있다. 그만큼 작가의 현실에 대한 인식이 깊다는 의미이다. 「검침원」과 같은 작품에서도 ‘누군가 당신의 삶을 저울질한다고/ 인정할 수 없다고/ 물론 완강히 거부하실 거예요/ 하지만 소용없어요’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본연적 존재의 삶이란 없고 늘 기록되고 검열되고 관리되는 하나의 구성원으로 자리하는 자아를 마주하게 된다.

 

이러한 자아와 세계의 단절적 관계, 즉 현실과의 불화는 서정시의 근거기반이라 할 수 있다. 자아와 세계의 단절은 시적 자아로 하여금 그 대안적 세계를 모색하도록 추동한다. 그러한 세계는 자연으로 상정되는 경우가 가장 일반적이라 할 수 있겠고 종교, 영원, 혹은 환상의 세계로 귀결되는 경우도 있다. 이들 세계는 현상적인 세계가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것, 혹은 현실과는 대척되는 지점에 위치하는 세계라는 공통점이 있다. 전건호의 작품에서 이러한 근원적인 세계는 상상력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특히 여성성과의 관련에서, 그리고, 감성에의 몰입 등의 양태로 발현되고 있어 주목을 끌고 있다.

 

그날은 명동에서 술 불콰해져 남산에 올랐던 거라 달빛은 왜 또* 어찌 그리 유장하던지 벚꽃 펑펑 튀밥처럼 터지는 봄밤 전생의 내자였을지도 모를 여자가 감빛 원피스 하늘거리며 꽃잎 밟으며 걸어오는 거라 그냥 말 한번 걸어보려 다가선 것뿐인데 짐짓 바삐 갈 곳이라도 있는 양 도리질하며 꽃비속으로 뛰어가는 거라 멍하니 새초롬한 뒷모습만 쫓는데 문득 길섶에서 건들바람 일어 나를 에돌아 달려가더니 그 여자를 더듬어대는 거라 순간 열이 확 오르는 거라 치마를 슬쩍 들치는가 하면 봉긋한 젖가슴 더듬고 머리칼 쓰다듬는데도 순순히 몸을 맡기는 거라 아슬아슬 실눈 뜨고 바라보는데 또 술이 확 오르는 거라 한 번 더 붙잡았으면 품에 안을 수도 있었을 그 여자 바람에 놀아나는 걸 눈 뻔히 뜨고 보면서 바람난 아내를 떠나보내던 처용처럼 피실피실 웃음만 나오는 거라 교교한 달빛 받으며 산길 내려오는데 덩실덩실 어깨춤이 절로 나오는 거라

 

「신처용가」전문

 

전건호의 시에서는 유난히 여성과 관련된 작품이 많다. 직접 여성이 등장하는 시는 물론이거니와, 여성을 상징하는 상관물이 등장하는 작품이나 여성에 대한 담론으로 진행되는 시를 포함하면 그 수가 적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과 시적 자아의 만남은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적인 만남이라는 것과 상상에 의한 관계의 진전을 노정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위 시에서도 화자와 여자의 만남은 스쳐지나가는 정도의 찰나적 부딪침에 불과하다. 그러나 화자는 여자가 ‘전생의 내자’였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으로 시작하여 바람 속을 걸어가는 여자를 바람에 희롱당하는 여자로, 자신은 ‘눈 뻔히 뜨고 보면서 바람난 아내를 떠나보내던 처용’으로 상상하기에 이른다. 바람과 여자라는 두 소재를 엮어내는 재치있는 상상력도 상상력이지만, ‘바람’이라는 어휘가 현상과 의미의 두 층위에서 이중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시인의 시어를 운용하는 능력 또한 간취되는 대목이다. 이러한 형태의 언어유희는 홍도동에서의 '홍도', 누에의 방에서 '잠실'과 같은 시어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잘 알려진 바대로 라캉에 의한 주체의 형성은 어머니와의 분리를 통해 상징계로 진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상상계가 어머니와의 분리 이전 통합의 관계, 주관적 감성의 세계, 무의식의 세계를 의미한다면, 상징계는 아버지로 표상되는 법의 세계, 객관적 이성의 세계, 규율화된 체계의 세계를 의미한다. 어머니와의 분리로 결핍을 내재한 채 상징계로 진입한 주체는 세계에 적응하면서 ‘아버지’라는 자리에서 그 결핍을 메우려고 한다.

이러한 라캉의 정신분석적 구도에서 볼 때, 다소 단선적인 분석이 될 수 있겠지만 전건호의 작품에서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는 여성과의 상상속의 관계, 그럼에도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 관계는 상상계에 대한 무의식적 지향과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상징계의 시적 주체는 진정한 주체가 아닌 세계라는 거대한 기계의 부속품으로 자리하는 자아를 인식하기에 이르고 이러한 상징계에서의 불화는 분리이전 통합적 세계, 근원의 세계에 대한 욕망을 내포하게 된다. 이러한 상상계로의 회귀에 대한 욕망이 전건호의 시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 여성과의 만남이라는 구도로, 그리고 이 여성에 대한 성적 상상으로 발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시인의 감성에 대한 욕구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겠다.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에 비친 나를 바라보다

눈물이 내미는 손을 잡는다

눈물방울 속에서

거리를 가늠할 수 없는 별이 반짝거린다

 

「눈물방울 별」부분

 

지금도 가슴 시린 것은

내일 또 만날 것으로 알고

손 한 번 못 흔들고 헤어진 사람

다시 찾을 줄 알고

낙서 한 줄 못 남기고 떠나온 담벼락이다

 

「때늦은 후회」

 

베란다 선인장 아래 쪼그려 앉아

가슴 저미는 시를 읽는다

……

말 붙일 사람 하나 없고

바람 한 점 없는 베란다에 홀로 쪼그려 앉아

시 한 소절에 잠 못 이룬다

 

「시를 읽으며 울다」

 

위에서 인용된 시들은 세계와의 불화를 발현하고 있는 작품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느껴지고 그 창작기법에서도 차이를 보이고 있는 작품들이다. 상징이나 과장, 너스레 등의 표현기법이 제거되고 내면의 정서 그대로를 내비치고 있기 때문이다. ‘눈물이 내미는 손’을 잡는 시적 자아가 눈물방울 속에서 반짝이는 별을 발견한다거나,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가슴 저미는 시’에 잠 못 이룬다는 것은 감성에 몰입하고 있는 자아를 명징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시적 주체의 의식은 ‘내일 또 만날 것으로 알고/ 손 한 번 못 흔들고 헤어진 사람’, ‘낙서 한 줄 못 남기고 떠나온 담벼락’과 같은 지극히 개별적 경험의 기억에 머물고 있다. 또한 시인의 시선은 세계의 코드가 아닌 가슴, 즉 자아의 내면으로 향하고 있다. 이는 현란한 시의 방법적 장치들이 제거된 것과 같이 시적 자아가 세계의 부속적 자리에서 떨어져 나와 비로소 온전한 자아와 마주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전건호의 시세계는 어느 하나의 속성으로 운위하기 어렵다. 현실과 환상, 현상과 감성을 넘나들며 그 형식적 내용적 측면에서 모두 다각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전건호의 작품은 뛰어난 상상력과 재치 있는 언어유희를 통해 무겁지 않게 그러나 결코 무디지 않은 현실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시세계에서 드러나는 현실은 인간이 본연적 자아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라는 거대한 기계의 하나의 부품 내지 소모품으로 존재하는 현실이다. 시인은 이러한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보다 근원적인 것에 대한 욕망을 그의 시를 통해 발현하고 있는데, 그 대안적 세계 또한 농(弄)과 진(眞), 너스레와 진지함을 오가며 긴장의 경계를 놓치지 않는 데 성공하고 있다.

 

 

2011 다시올문학 봄호